이 시대에 부는 성령의 바람

이 시대에 부는 성령의 바람

 

 

우리는 탐욕과 무한한 번창이 허용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속의 종교계는 이런 것들을 ‘축복’이라는 항목으로 분류한지 이미 오래다. 우리는 또한 행성 어디에 있는 사람과도 통화할 수 있는, 곧 만인이 만인과 소통할 수 있는 이상한 지경에 도달했다. 필시 이는 땅 끝까지 전하라는 확산의 원리와도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생물의 본능은 무한한 번식이요, 밖으로 뻗어나감이니 이는 탓할 일은 아닐 것이다. 눈을 안으로 돌리는 풍토를 저해하기는 하지만.

열두 명의 인간이 영원한 침묵이 흐르는 달에 발자국을 남기고 돌아오기도 했고, 허공에 매달은 눈이 별과 별 사이의 빈 칸에 초점을 맞추어 그야말로 우글거리는 은하들의 모습과, 더러는 격렬하게 충돌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 작은 행성에 태어난 인간들의 위상에 관해 존재론적 허망함을 손짓하는 것이다. 수천 억 별들의 집단이 서로 엉길 때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의 운명은 어찌되는 것일까?

고생물학자들은 수억 년 전 지구 생물의 90% 가량이 원인 모르게 멸종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수억 년간 지구에 군림하던 공룡들이 수천 년 전에 외부 천체와의 충돌로 졸지에 끊겼음을 말해준다. 선이나 악이 적용될 리 없는 그들이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달 표면에 무수히 많이 패인 구덩이들을 보는데, 근년에는 지구 도처에서도 그와 같은 충격구 170여 군데를 찾아냈고, 태양계 변두리에는 위험한 혜성으로 돌변할 후보군들이 거대한 띠를 형성하고 있으며, 밤마다 하늘을 관찰하는 천문학자들은 이들 중의 어느 하나가 지구에 충돌할 것은 단지 시간문제라고 공언한다. 이미 우리 세대는 혜성이 목성에 충돌해 지구보다도 큰 자국을 남긴 것을 관찰하지 않았는가? 실로 수만 년 지속해온 인류문명은 한낱 찰나적인 현상인가 보다.

빌딩이 빽빽한 도심에서 위험하거나 노후된 건물을 안전하게 폭파하는 해체공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절묘한 기술로 건물을 폭삭 주저앉게 한다. 그런가 하면 위험한 연구를 진행하는 건물이나 비밀군사시설에는 비상시에 자폭 프로그램을 설정하여 카운트다운에 들어가는 영상을 영화에서 종종 만난다. 그런데 이와 같이도 신약성서의 끝 책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자체를 조직적으로 파괴해 가는 과정이 섬찟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도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것처럼 단계마다 ‘접시’며 ‘나팔 소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지금 65억의 인류가 저마다 유행 따라 탐욕에 몰입해 있지만, 기독교는 처음부터 역사가 한없이 쓸 수 있는 노트가 아니라, 마지막 페이지가 이미 창조주에 의해 적혀 있는 노트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나 이 ‘끝 페이지’를 열어보기 싫어하며, 대신 신문과 TV가 실어 날라다주는 말 속에 매몰돼 있는 형국이다.

이런 정황에서 ‘이 시대를 향한 성령’에 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기도 하고 위험한 노릇일 것이다. 교회 안이나 밖이나 아무도 관심하지 않으니 어리석고, 또한 누가 감히 하늘과 접속하여 그 뜻을 헤아리겠다고 하겠는가? 필자는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시절 졸업식 같은 데서 교장선생이나 학생대표가 축사나 답사를 한다면서 말끝머리에 가서는 의례히 ‘…에 대신하는 바이다’라는 상투적인 행태에 대해 진저리를 낸 적이 있다. 이면 이고 아니면 아니지 왜 ‘대신’하는 것인가고. 그런데 이글을 청탁받고는 그때가 떠올라 나도 ‘대신하는 바다’라고 하면 되겠구나 해서 응낙한 것이다. 아무도 별로 경청할 사항이 아니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사태이니 무척 수월하지 않을까 해서. 하늘이 웃으시고 허락하시기만을 빌 뿐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는 사회가 불안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 의례히 묵시록의 시나리오가 자기들 시대를 지칭한다고 해석해 왔다. 우리도 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허나 20세기에 들어 인류는 원자내부까지 파헤쳐 그것을 이용한 폭약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 교묘한 기술은 날로 증폭돼 오늘에 이르러서는 지구 자체에 영향을 미쳐 행성을 긴 잠에서 깨우기에 이르지 않았는가?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찰나적인 인간종자와 문명의 위상을 더 큰 그림에서 이해하고 있다. 그러니 하늘에서 화염에 쌓인 바위덩이가 떨어진다든지, 세상의 모든 섬들이 사라진다든지, ‘끝이 도래했다’는 선언이나, 급기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진다’는 언급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환경을 보호하고 개선하겠다는 무리들의 애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갸륵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그걸로 큰 벌이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으며, 모든 인류가 탐욕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지구파괴의 진행은 막을 수 없으니 이 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결국 창조주로부터 지구학교의 해체를 위임받은 전담자들의 아바타로서의 운명을 타고 출현한 세대가 아닐까? 묵시록은 지구를 파괴하는 주체로 인류를 지목하지 않고 천사들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무섭고 불가사의한 인식이 아닐 수 없다.

 

요나서라는 작품은 하늘의 명을 거역하고 도주하는 당돌한 인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그는 하느님이 가라는 방향과 정반대쪽으로 향하는 배에 승선한다. 그리고 도중에 풍랑이 일어날 때 배 밑창에서 달게 자고 있다. 하느님이 배를 흔드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원과 선객들이 두려움에 싸여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고 제비뽑을 때 요나가 걸리자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처지를 밝히고 자기를 바다에 처넣으라고 한다. 실로 당돌할 뿐 아니라 당찬 인물이라고 하겠다. 그의 말대로 하자 풍랑은 곧 잔잔해진다. 거기 있던 이들은 바다의 신이 노할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치면 풍랑이 정말로 멎는다는 것을 실감했을 것이고, 또한 사태의 전후 진행을 해말갛게 꿰뚫고 있으면서도 죽는 것을 무서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인간이 있다는 데 놀랐을 것이다. 그들은 이런 마음의 후폭풍을 맞았으리라. 지구 처처의 잦은 지진과 기상의 불규칙성은 배를 뒤흔드는 풍랑과도 같이 인류의 탐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인류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우리도 이 모든 것이 창조주의 결행인 줄을 알고 달게 자야할 것인가고 묻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풍랑에 시달릴 때 스승은 태연히 잠들어 있었다. ‘땅이 뒤틀리고 산들이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쳐 파도가 들끓어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표현(시편 46편) 그대로인 것이다. 제자들은 풍랑에 놀라고, 그 모습에 놀랐을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예수께서 풍랑을 향해 명하자 금세 잔잔해졌다고 한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놀랐을 것이다. 곧이어 제자들에게 왜 겁을 먹었느냐고 힐문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태평을 지니라는 것일 게다. 눈에 보이는 만상을 주관하시는 이를 믿는 자녀들이라면 그 만상이 일어서든 꺼지든 큰 호흡 한 번 하고는 평안에 안주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지구적 격변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여야 하리라.

한 스승이 도(道)에 관해 강론하자 듣고 있던 제자는 “어느덧 코를 골고 있었다.” 그러자 스승은 꾸지람을 하기는커녕 도리어 “크게 기뻐하며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고 한다(『장자』). 그 제자에 그 스승인 모양이다. 그들은 강론을 핑계 삼아 존재의 본래적 평안을 주고받은 것이다. 잠시 살다 사라질 인생들은 무욕(無慾)의 상태에서 비롯되는 이 무근심, 이 무걱정을 거처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죽음을 벗어난 예수는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입으로 큰 숨을 불어주며 두려움 없음을 전염시킨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마’고 한 그분의 약속은 아직도 유효하리라.

 

지금은 집집마다 화초를 기르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는 듯하다. 어떤 이는 물을 주면서 식물에게 말을 걸기도 한다. 감성이 통하는 애완동물을 가족의 일원으로 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그리고 관공서나 병원 같은 데를 가보면 자기가 하는 일을 정말로 사랑하고 고객을 미소로 대하는 이들도 종종 만난다. 피부색이 다른 타인종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열려져 있다. 누가 이름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기 시간을 내서 소리 없이 남을 돕고 기쁨으로 삼는 이들도 생겼다. 수십 년 전만해도 볼 수 없었던 흐뭇한 풍경들이다.

그런가 하면 근년에는 고양이와 개, 쥐와 고양이, 소와 돼지, 또는 사자와 호랑이 등 동물 사이에서 벽을 허물고 서로 배려하는 기이한 광경도 지구 도처에서 나타났다. 양과 사자가 함께 뒹굴고 풀을 뜯는다는 초현실의 세계가 떠오른다. 기지개를 펴는 지구가 지표의 생물계에 모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일까? 이렇듯 우리는 큰 그림에서 거대한 위기를 예감하고, 작은 그림에서 긍정의 조각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2% 부족하다’는 말처럼, 그 밝은 사태는 마치도 화분에 담겨 있는 형국이요, 뿌리를 땅에 내린 인상은 아니다. 그 2%의 부족은 무엇일까? 바쁘지 않던 시절에 살던 우리 선조들의 혜안과 삶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그들에게 산이나 하천은 개발의 대상이 아니요, 구름이나 바람은 기상예보의 사항이 아니었다.

“창을 열면 거기 그대로 산 빛이더니
문을 닫아도 거기에 또 시냇물 소리 들리네.
……
경계가 고요하매 숨어살기 편안하고
몸이 한가하거니 모든 행동 가뿐하네.
피로하면 때때로 비스듬히 누워 쉬고
한 잠 푹 자고 나면 거닐기도 해보네.”

선조들에게는 언제나 한 자리에 서있는 산들의 싱그러움과 푸르름은 변치 않는 영겁의 상징이요, 흐르는 물은 우리가 쉴 새 없이 변천하는 세계에 들어왔음을 일깨워주며, 잡념을 씻어주는 벗이다. 시인은 휴대폰이나 게임기가 없다고 우울증에 걸리거나 보채지 않는다. 그는 말없는 벗들처럼 홀로 살아감을 감미로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만성 피로증’이란 낱말을 이해하려면 아마 만 년이 걸리지 않을까? 심심함은 그에게 호흡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2%가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이끼 낀 오솔길에 찾는 사람 없나니
……
일 년 내내 지나도록 칭찬, 비방 전혀 없다.
때로는 시냇가로 한가히 혼자 나가
시원히 누더기 벗어 ‘여라’ 덩굴에 건다.”

이런 선조들은 산의 빛깔과 물소리로 하여 배가 부르다고 묘사한다. 어째서 그럴 수 있을까? ‘누더기’를 입고 살아가면서도 이생에서 그 이상은 필요치 않다고 보는 시각이 그것이요, 때로는 혼자 시냇물로 가서 허리를 굽혀 옷을 빨고, 다시 등을 펴고 후련해진 몸을 일으켜 덩굴에 덜렁 걸어놓고 햇볕에 마르기를 기다리는 품이 아이의 흥겨움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시인은 알몸이 되어 서있다. 그리고 시에는 노동과 효율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는 지략을 펼 기회를 제공하거나 적어도 존재감을 느끼게 할 비난이 없어도 좋고, 기분을 좋게 할 칭찬이 없어도 개의치 않다는 것이다. 홀로 넉넉하기 때문이리라. 이름을 내고 지위를 얻으려는 것은 이들처럼 산과 구름과 오솔길의 정취가 몸에 스며들지 않았기 때문이요, 불평과 원망은 이들처럼 나홀로 자족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팡이를 끄을고 깊숙한 길을 찾아
혼자 배회하면서 봄을 즐기다
돌아올 때에 향기가 옷에 묻어
나비가 멀리 사람을 따라온다.”

시인은 등산복이라는 것을 입고 있지 않다. 그리고 지팡이도 그와 함께 길을 나선 동행자요, 일부러 장만한 장비 같아 보이지 않는다. 휴가를 얻어 가는 여행이 아니라, 봄이 오면 의례 한 바퀴 돌고 오는 품이다. 여유로워 보인다. 그는 편하게 닦긴 길보다는 깊숙한 길을 찾는다고 한다. 그것은 현대인들처럼 일부러 위험한 모험을 펼치는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존재의 심연을 공명시키고 싶어서일 게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도중에 밥을 해먹거나 앞산을 향해 소리친다고 상상하기 어렵다. 밥은 출발할 때 먹었을 것이고, 산의 고요를 깨고 싶은 동기가 있을 리 만무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봄날에 산이 주는 바를 온 몸으로 묻어오고 싶을 뿐이다. 그것이 길을 떠난 목적인 것이다. 그의 눈은 손님 하나가 멀리서 따라오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한 폭의 그림 같다. 그는 돌아와 어느 꿈속을 날고 있을까?

“이 방이 이리도 크고 텅 비어
온갖 생각이 다 사라진다.”

현대인들 눈에 썰렁해 보일 공간이 시인에게는 뿌듯한 실체인가보다. 무엇을 채우려는 기색이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빈칸과 합일함으로써 일체의 잡념이 사라진 것을 반기고 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결국 모두가 생각에서 비롯되지 않는가? 이 시인처럼 비어있음을 사랑하고 존재의 맑음을 얻어보고 싶어진다.

“구름 속에 살기에 달력이 없어
매화꽃이 피면 해 바뀐 줄을 안다.
……
털끝만큼도 생각함이 없으면
정신(神)은 어리어 하늘처럼 넓으리.”

지금은 방마다 시계와 달력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이 모두가 우리를 재촉하고 있다. 헌데 시인은 달이 뜨고, 해가 지는 것으로, 또는 꽃이 피는 것으로 시간과 세월의 흐름을 감지한다. 숫자를 읽는 번거로움도 쫓김도 없을 게다. 구름 속에 살기 때문이다. 물상의 분별이 사라졌으니 생각이 일 리 만무요, 그 빈칸은 넓은 하늘로 화한다. 가없는 넓음을 얻은 것이요,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부러움을 일으키는 지경이라 하겠다.

이들 선조들은 사람이 지어낸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인간보다 먼저 있어온 산과 내와 하늘을 벗 삼은 가난한 이들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들을 두고 진정으로 복된 존재라 선언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두려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족함과 자유의 화신들이다. 그들의 거동은 헐렁하고 풍만해 보인다. 예수 자신과 그 제자들이 그랬고, 수많은 성현들이 이렇게 살아갔다. 그들은 최소의 물질, 최대의 정신을 지향한 것이리라. 이를 거꾸로 사는 자들은 존재의 허기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망치게 하는 근본 원인은 이 뒤틀린 구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애벌레는 나무의 가지 따라 움직이며 잎사귀 면을 갉아먹고 살아간다. 그러니 1차원이나, 2차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일체의 움직임을 멎고 한곳에서 고치를 쳐 제 몸을 감싸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테로이드를 분비해 이제까지의 형태를 죽이고 이 꽃 저 꽃 사이를 자유롭게 나는 나비의 몸으로 태어난다. 나비는 3차원적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잎사귀를 갉아먹고 살지 않는다.

혹시 애벌레는 고치 속에서 그 종(種)의 집단적인 기억으로부터 장차 날아다닐 나비가 되는 꿈을 꾸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2차원에서 금방 3차원 존재방식으로 전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갔더니 노자는 머리를 새로 감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말리고 있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움쭉도 하는 기색이 안보여 마치 사람이 아닌 듯하였다. 공자는 그것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윽고 노자를 만나 물었다. ‘제가 잘못 보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사실이 그랬을까요? 아까 뵈온 선생님의 모습은 마치 마른 나무가 오뚝 서있는 것 같아서 만물의 존재를 망각하고 인사(人事)를 완전히 떠난 끝에, 천지 사이에 선생님만이 홀로 계시는듯한 인상이었습니다.’ 노자가 대답했다. ‘나는 만물의 근원인 도의 세계에 노닐고 있었다.’” (『장자』)

노자는 외형적으로 말해 깎아놓은 조각상처럼 절대부동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관찰자는 혹 착시현상이 아닌가고 여길 정도였다고 실토한다. 그때 노자의 내면적 의식은 시공을 넘어 만물의 근원으로 잠입했다고 한다. 이것은 고치 속에 죽은 듯이 있는 애벌레가 3차원 나비되는 꿈을 꾸는 것에 해당되지 않을까고 묻게 된다.

예수는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거기서 그는 놀라운 광경을 보여준다. 그들 앞에서 그의 옷이 눈부시게 희어지고, 얼굴에서 광채가 발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얼떨떨해졌다고 한다. 예수의 몸을 이루는 모든 세포의 원자 내부로부터 어떤 에너지가 터져 나온 인상이다. 그 에너지는 예수의 몸이 아닌 직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분 의식은 노자처럼 시공 너머의 근원으로 침잠한 것이요, 비유적으로 말해 장차 될 나비의 꿈을 꾼 것이리라. 이는 인간 존재 내부에 생물의 양태를 빛의 몸으로 전환시킬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까? 예수는 그가 한 것은 우리도 할 수 있고,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히셨기 때문이다.

공룡들은 육중한 몸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들은 지면을 이동할 때 뒤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집단적인 무의식에서 가벼운 몸을 희구하지 않았을까? 어찌됐건 생물학자들은 오늘날 창공을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새들이 바로 그 공룡의 후신들이라고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큰 그림에서 이해할 때 비극적인 혜성이나 소행성의 충돌은 그들의 꿈을 이루어준 매개인 셈이다.

생물계에 군림한 인류는 공룡의 갑옷과도 같은 ‘문명’을 덧입고 살아간다. 그리고 예리한 혼들은 날로 복잡성을 더해가는 이 문명이라는 메커니즘을 뒤둔하게 느낀다. 인류의 거의 모두가 참여한 ‘경제’라는 엔진은 날로 과열되고, 그 결과물인 정신적, 물질적인 ‘쓰레기’는 더 이상 쌓아놓을 자리가 없는 지경이 아닌가? 우리들이 이런 형국을 지어낸 오늘날에 이르러, 우연의 일치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경륜에 따라서인지, 대지는 자주 흔들리고, 산 정상에서는 불과 검은 연기가 뿜어 나오며, 대양의 물은 벽처럼 일어나 몰려오고, 흉흉한 바람은 거칠 것 없이 몰아친다. 이 모두 애벌레 상태의 지구자체가 나비로 탈바꿈하고자 분비하는 스테로이드에 해당하는 것일까? 아니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도래시키기 위해 창조주로부터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해체하도록 위임받은 이들의 작업이 진행 중인가?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로 변한 거대 몸집의 공룡들처럼 지금 인류의 집단 무의식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빛의 몸으로 살기를 희구하는 것이 아닐까? 그곳에는 눈물이나 고통이나 죽음이 다시는 없겠다고 묵시록은 일러준다. 눈물이나 고통은 우리가 사물을 ‘주체와 객체’로 인식하는 두뇌를 지녔기 때문이요, 죽음은 우리들이 남의 죽음을 통해 그의 살을 영양분으로 섭취하는 생물이기 때문이 아닌가? 자기와 대상을 일체로 느끼는 것을 ‘사랑’이라 하고, 우리들은 본시 남의 살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는 인식에 동틈을 ‘빛’이라고 한다.

최소의 물질과 최대의 정신으로 살아간 성인들이 보여준 바가 그것이요, 예수의 몸처럼 빛이 터져 나올 ‘나비 지구’에 동참할 인간들은 바로 그 ‘빛과 사랑’을 염원하던 영혼들이리라. 예수와 묵시록 저자의 비젼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시방편으로 마련되는 터전이 아니라, 이런 이들을 위해 창세전부터 준비된 것이라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우리는 지금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 확신과 고백은 참으로 우리들 생활에 침투해 있는 것일까? 각자 자문해볼 만하다.

시간의 끝에 실현될 그 초월적 사태를 동양의 성현들은 어느 특정 공간에 설정하고 있다.

“동쪽 바다 가운데에 섬이 몇 개 있는데, 그 섬에 바람을 마시고 이슬을 먹고 사는 도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곡식을 먹지 않았고, 마음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호수처럼 맑고 투명했으며, 얼굴은 처녀처럼 싱싱하고 건강한 어린아이처럼 활기가 넘쳤다. 그들의 마음은 부드럽고 늘 열려 있었으며, 부정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없었다. 자기의 일을 남에게 떠넘기는 일이 없었고, 늘 남을 돕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 분노, 긴장, 불만족이 없었다. 누가 누구 위에 군림하는 일도 없었고, 누가 누구 밑에서 복종하는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천지자연의 은택을 즐기며 풍요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해와 달이 밝게 비쳤고 계절의 운행도 순조로웠다. 비와 바람도 항상 알맞았고, 동물들도 늘 좋은 때에 번식했다. 땅은 풍요로 넘쳤고, 모든 사람들이 친절했다. 질병이나 재앙도 없었다. 신들이 그 땅을 축복했으며 악귀들은 그 땅 근처에도 못 갔다”(『열자』).

아이의 마음으로 사도신경을 진솔하게 곱씹는 영혼들에게 이 묘사는 장차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한편의 본보기로 들리리라. 그리고 그런 이는 묵묵히 ‘빛과 사랑’으로 자기 삶을 추슬러 갈 것이다.

 

우리는 가까웠던 이의 죽음을 당해서 인생의 무상함을 뼛속 깊이 경험한다. 현실의 비현실성이라는 속살에 눈뜨는 것이다. 그 후로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환영 속에서 헤엄치는 그림자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정말로 있는 것인가?

“옛사람 중에는 그 지혜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이들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도달했던가. 처음부터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는 지극하고 최고의 것이어서 더 첨가할 것이 없는 경지였다.”(『장자』)

그러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지는 사태는 이런 ‘본래 없음’의 ‘자기복제’라 할 수 있을까? 모세는 손에 든 지팡이가 꿈틀거리는 뱀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놀란다. 그리고 다시 뱀이 딱딱한 나무토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신의 능력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이 현상세계가 한 조각 환영이라는 지평에 눈떠, 그는 노년인데도 불구하고 이집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무서울 게 없는 것이다. 베드로 또한 닫힌 문을 통과해 나타난 스승을 목격하고는 그와 유사한 지평에 눈뜬다. 예수 앞에는 죽음이라는 생물학적 벽이나, 문이라는 물리적 벽이나 한낱 환영에 불과하지 않는가? 베드로는 더 이상 무서워할 게 없는 가슴으로 세상을 향해 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비현실성과 비실재성이라는 두 가지 위상을 목도하고 있다. 양자역학은 전자와 같은 미시세계에서 ‘산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의 상태가 혼재함을 발견했고, 관찰자의 행위가 그 두 가능태에서 한 가지 현실태를 야기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순서가 뒤바뀔 수 있음도 말해준다. 세계의 성립은 어쩌면 ‘보니 좋구나’ 하는 관찰로 인해 ‘본래 없음’에서 현실태가 된 것이요, 다시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는 관찰자의 투영이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함몰’을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내 직업을 묻지 마오. 나는 눈먼 이들의 마을에서 거울을 판답니다.” 하는 말이 있다. 부활 후 어느 마을에 나타나 행상인으로 변모한 예수가 외치는 모습이다(『낙함마디』).

여기 눈먼 이들이란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요, 그들은 처음에 상인의 말을 야유하는 것으로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개중에는 자신의 눈멂을 새삼 자각하고 ‘나도 눈 한번 떠서 내 모습을 보고 싶구나’ 하는 열망이 일어나지 않을까? 예수가 의도한 것이 그것이요, 그 열망으로 하여 눈을 뜨고 자기 얼굴을 보았다면 무엇을 발견할까? 아마도 모세나 베드로와 같은 놀라움에 접하지 않을까?

성서는 에녹이 하느님과 함께 걷더니 사라졌다고 기술한다. 예수의 승천에 관해서도 같은 범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계는 여전한데 이들이 어느 ‘장소’로 이동한 것일까? 차라리 이들은 환영세계를 함몰시키고 실재에 눈을 떴으며, 나머지 인류는 눈뜨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환영을 키우고 있다고 해야 하리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는 창조주와 죽었다 다시 사신 그 아들의 또 한번의 양자적인 관찰에서 야기되는 것이요, 그 과정을 순산(順産)으로 이끌 몫이 우리들 인류 전체에 놓여 있는 것이다.

 

묵자는 사람들이 서로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는 인생을 내신 하느님이 먼저 인간들을 사랑하셨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그가 바라시는 바이기 때문이라고 설파한다. 실로 깊은 혜안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는 그의 적수들이 인정하듯 자기 신념대로 살았던 것이다. 요한 서신의 저자도 하느님이 사랑이시니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하지 않는가?

노자는 상대가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모두 착함으로 대할 것을 넌지시 보인다. 예수께서도 하느님은 악인이나 선인에게 똑같이 햇볕을 비춰주신다고 하면서 우리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명한다. 인생은 살다보면 허물을 짓기 마련이요, 타인의 허물을 용서해야 자신도 하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여, 예수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묶어 놓는다.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 인류는 이런 성현들의 말대로 사는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이런 가르침이 무겁게 들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은 왜 그럴까? 우선 가르치는 자들조차 ‘가르치는 것’으로 ‘그렇게 사는 것’을 대치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종교적인 용어들을 피차 주고받아 연막을 피우고 교묘히 그 사태를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속이는 건가? 언어의 범람이야말로 존재의 향기인 사랑을 차단하고 있다. 이제는 입에 손을 대고 다시는 열지 않겠노라 결의하는 욥의 모습처럼 조금은 숙연해져야 하지 않을까?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혜성을 상상이라도 하며, 아니 ‘끝이 도래했다’는 천사의 선언을 이 시대를 향한 언명이라 여기며 인류애를 지구의 새로운 풍속도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계명은 당시에 지중해 주변의 로마제국 영토와 그 변두리를 염두에 두고 하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인들이 세계 각처로 흩어질 즈음 이미 완료된 것이다. 그리고 서로 붙은 대륙, 곧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유럽으로 말한다면, 북으로 핀란드, 남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서로 스페인, 그리고 동으로 한반도가 끝이요, 이 공간적 확산은 거의 완료된 형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남은 과제는 종시를 맞은 자세로 내실을 다지는 것이요, 그것은 사랑이지 않는가?

기독교는 처음부터 끝을 말하며 시작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자는 매순간을 시간의 끝인 양 받아들여 나를 내신 근원자 앞에서 책임적인 실존으로 서며, 미래를 그의 손에 달린 빈칸으로 보는 것이다. 그 자세는 또한 ‘내일 종말이 오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가슴을 품는 것이요, 그 사과나무는 다름 아닌 ‘사랑’이다. 성령이 모든 시대, 모든 영혼에게 명하는 것은 ‘예수가 보여주신 사랑’이요, ‘모든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과 ‘두려움을 모르는 자유’이다.

『기독교사상』2010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