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항상 큰 것에 뿌리내리고 호홉하라
002. 그대 삶의 먼동이 트는 날
003. ‘신의 정원’으로 통하는 문
안희찬(성북교회 목사)
책을 소개하려 하면 글을 소개해야 하고 글을 소개하려면 글쓴이를 이야기해야 하고 글쓴이를 이야기하려면 그의 됨됨이를 말해야 한다.
좋은 글을 대하다가 글쓴이를 만나면 글쓴이로 인해 글을 잊는다.
노자의 가르침을 본 성문지기가 책을 팽겨쳐두고 노자를 따랐듯이,
예수의 말씀을 들었던 이들이 그냥 예수를 따랐듯이,
노자나 예수의 말이 위험했듯이 이 책에 있는 곽노순의 말은 위험하다.
「신의 정원」이란 책의 말들은 인간의 혼을 예민하게 한다.
꼭 필요한 이들만 보아야하는 위험스러운 책이다.
좋은 것이면 많은 이들에게 고루 주어 많은 이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성숙된 사회에서조차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듯하다.
비유도 아니고 이야기도 아니며 전설도 아니다.
정직하게 대하면 감당키 어려운 힘이다.
‘평하여 좋은 책이니 많이 읽으시오’라고도,
‘좋은 책으로 잠언과 같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제대로 살려는 이들이나 읽어야 한다’고 할 수도 없다.
성경처럼, 노자처럼, 읽어 보라고나 해야 할는지…
책으로 출간하였으니 ‘와 보라’ 했던 말처럼 ‘펴 보라’ 해야 하겠는지…
나는 이 책을 성경과 함께 두고 있다.
‘어두움에 있었네.
빛을 만났네.
한숨에 이끌려 정신없이 다녔네.
그러다 나를 보았네.
바다 같은 슬픔에 어두움으로 잠겨 갔네.
다시 빛으로 가득 찬 날을 그리며
희망을 따라 가네.’
「신의 정원」의 속살을 보여 곽노순을 보여주려 한다.
영원의 벽에 낙서를 하고
흙으로 된 몸이 다시 풀어지기 전에 ‘사랑’을 알았다면
큰 은혜가 아닌가?
‘기도’를 알았다면 큰 기적이 아닌가?
몸으로 있는 동안 몸들끼리 사랑을 하고
형체를 지닌 동안 형체 너머와 소근거린다면
영원의 벽에 낙서를 하고 내 이름을 새겨 놓는 것이 아닌가?
잠시 받은 몸이 고맙게 느끼도록 살라.
사랑과 기도만이 영원한 이윤으로 남는 것이다.
차차 예수의 됨됨을 닮아 간다
가끔 눈을 부릅뜨고 흥분을 물리쳐 보라.
무사처럼 권태를 단칼에 베고
폭풍처럼 이해타산을 쓸어 버려 보라.
한 편의 시시함에도
다른 편의 심각함에도 사로잡히지 말라.
홍해를 가르고 전진하듯
자연의 그저 그러함을 향해 나아가라.
가끔 스스로 물어라.
나는 강물이나 바위와 같은
심심함을 누리는가?
나무와 새, 강아지와 갓난아이같이
싱싱함을 일으킬 줄 아는가?
대지에 빛을 내리쪼이는 태양이나 비를 쏟아놓는 구름처럼
싱거운 짓을 할 줄 아는가?
차차 예수의 됨됨을 닮아 간다.
존재의 숲을 홀로 걷는 이
낳고 죽는 것이 꿈이니 그 사이에 무엇을 두려워하며
같은 시대에 꿈길에 들어섰으니 미워할 게 무엇이며
깬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있을 것이 이미 가지런히 다 마련되어 있으니
절망이니 욕망이니 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이요,
두려워하지 않으면 믿음이요,
낙망할 수 없으면 소망이라.
존재의 숲을 홀로 걷는 이의 가슴에
이 세 꽃잎이 열리고, 웃음을 토한다.
내가 누구이기에 남의 마당을 쓸까?
남과 갈등이 생기면 나는 내 속만을 들여다본다.
내게 욕심이 동했던가?
미움으로 차 있으면서 벌써 3시간을 보낸 것이 아닌가?
지금 분을 내어
다른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해서 내 속만을 가볍고 환하게 한다.
남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할 의무가 없다.
살기도 짧은 생이거늘 어찌 주(註)를 붙이며 가랴?
내가 누구이기에 남의 마당을 쓸까?
예수가 먹기를 좋아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한다.
날이 선 칼은 집이 필요하듯이
곽노순 목사는 노랫가락 시끄러운 시장의 한가운데
우리 모두와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안도환 목사
때론 하나의 단어, 한 줄의 문장이 잔잔한 감동을 주며,
상상력을 발동케 하는 때가 있다.
그것은 시(詩)의 세계다. 나에게 성경은 하나의 시다.
한 단어에 전 존재가 침몰되기도 하고,
지친 영혼과 몸을 다시 살리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전인가 보다.
살면서 그런 경전과도 같은 글이나 책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새벽에 우물가에서 생수를 뜨듯 경전을 읽는다.
혹은 뒷동산 너머 잠들러 가는 석양을 바라보며 경전을 읽는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순간이다.
곽노순님의 『신의 정원』은 나에건 경전과도 같은 책이다.
이 책은 군대 훈련소 기간 중에 우연히 만났다.
훈련소 교회 책장에 있던 것을 내무반으로 가지고 와 하루 한편씩 읽었다.
훈련을 마친 후, 저녁식사를 앞두고 읽는 한편은
하루의 지친 몸과 영혼을 푸는 청량제와도 같았다.
영성수련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은 나에게
‘여기-있음’의 세계를 명료하게 해주는,
그리고 ‘이곳-되어감’의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주는 금쪽같은 책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133개의 명상시들은 머리회전 빠르고 세상살이에 민첩하여
똑 소리 나는 분들에게는 어쩌면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성취보다는 존재의 훈훈함으로 살려하는 분들이라면
영생의 생수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복음가수 홍순관씨는 이 책을 토대로
그의 음반 [신의 정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신의 정원을 산책하노라면,
삶과 죽음, 인간관계, 병, 걱정, 서글픔, 조급함, 분통, 두려움, 비겁, 야심,
불평, 원망… 등등 삶의 문제와 상황을
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시각을 얻게 된다.
아주 쉽고도 가볍게 이 삶을 건너가라는 손짓에 절로 고개가 끄덕이고,
복된 삶으로 이끄는 담백한 언어로 가슴은 이내 따스함으로 채워진다.
그대가 이 책을 손에 쥐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나와 같은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혼(魂)이 자라가고,
사색의 힘이 자라가고, 존재에 동이 터오는 느낌을 경험하길 바란다!
그래서 이 책은 아무한테나 권하지 않는다.
아니, 권할 수가 없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하셨기에.
혹, 눈먼 이들이 라면 끊여 냄비 밑받침으로 쓴다면 부아가 날 것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