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파노라마
우주의 파노라마
– 대문을 열며
태양 : 뭇별 중의 하나 ▸▸▸ 13
수장쩍은 천체 ▸▸▸ 23
대 경주자 지구 ▸▸▸ 33
해와 달과 지구의 조화 ▸▸▸ 45
물질의 입자성과 파동성 ▸▸▸ 57
전자의 형태 ▸▸▸ 75
우주를 이루는 힘 ▸▸▸ 91
미립자들의 현상 ▸▸▸ 109
2천억 개의 태양 ▸▸▸ 121
별들의 탄생과 성장 ▸▸▸ 135
별들의 최후 ▸▸▸ 155
미확인 비행 물체 ▸▸▸ 177
팽창하는 우주 ▸▸▸ 199
무(無)에서의 창조▸▸▸ 219
– 대문을 나서며
인간과 생명과 우주, 이것들은 인간이 영원히 풀어 나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이 쉽지 않은 주제들을
지은이는 극미세의 세계와 초거대의 우주를 꿰뚫는 혜안으로
솜씨 좋은 장인처럼 술술 다루어 나갔다.
이 책을 손에 드는 독자들은 사고의 지평이 넓어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 방건웅 Ph.D. (한국표준과학연권, 책임연구원) –
자연과 예술과 인생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우리는 풍류를 즐길 수 있다.
꽃과 바람과 별들이 하나의 생명체를 이루는 세계이다.
물리학과 시와 신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세계를 보는 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덧 풍류에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 유동식 文學博士 (연세대 명예교수, 종교학) –
감각으로 확인하는 자연계뿐만 아니라 느낄 수 없는 근원적 창조세계에까지
우리의 눈을 밝혀 성숙한 신앙을 자리 잡게 한다.
이 세상 만물 어느 것 하나 조물주의 손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음을 새삼 일깨워
읽는 이들의 삶을 신실과 겸허로 이끄는 책이다.
– 이진호 Ph.D. (연세대 공과대학 교수, 기계공학) –
천체에서 핵의 내부까지 두루 편력하는 통달한 눈길은
세상을 살피는 순례자의 육성,
그 정확성은 미세한 데까지 이르고 그 총괄은 우주에 미쳐
우리 삶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밝고 귀한 것으로 빛내 준다.
생의 아름다움과 그 신비가 묻혀 가는 때에
이 글은 이 시대의 웅장한 예언으로 들린다.
詩句처럼 정선된 글들로 차고,
신앙으로 떠받쳐진 이 책에 미래의 위로와 지표가 있다.
– 민경배 文學博士 (연세대 신과대학장, 교회사)-
방건웅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우리는 예부터 하늘을 모시고 살아온 민족이다. 우리 민족의 삼대 경전으로 「천부경」「참전계경」「삼일신고」를 꼽는데, 이중 「참전계경」을 보면 하느님은 보지 못하시는 것이 없고 듣지 못하시는 것이 없다 하였으며, 「삼일신고」에서는 감히 이름 지어 헤아릴 길이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간이 제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하느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며 곧 하느님은 우리의 사고 범위를 훨씬 벗어나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감히 하느님의 이름을 지어 부르지 않고 그냥 하느님, 아니면 하나님❲一神❳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들 경전에서 보듯이 우리에게는 예로부터 하늘을 섬기고 공경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의 밑바닥에 깔린 공통된 심성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옛날 부여, 예맥, 그리고 고구려 때 나라의 임금이 친히 주재하는 영고, 무천, 동맹과 같은 천제(天際)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제사장의 역할을 임금이 겸하였으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은 거국적인 일이었고, 이때까지만 해도 일상생활과 하늘을 모시는 일에는 괴리가 없었다. 늘상 하늘을 생각하면서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이 천제가 어느 사이엔가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와 유교의 영향 속에 사라지고 이제는 개천절에 단군 할아버지께서 하늘을 여신 것을 기념하는 일과성의 행사로 그치게 되었다. 하느님과 일상생활은 거리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으며,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부터는 하느님을 믿는 것은 영생과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팽배하였고 종교생활과 일상생활이 따로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로 과학이 종교를 대신하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과학이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못하였던 중세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종교에 의지하여 교회에서 설명하는 대로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과학이 발전하여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을 접하게 되면서 우주관과 자연관이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하느님의 입지는 더욱 좁아져서 내세의 세계라든가 삶의 의미 등과 같이 과학이 아직도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으로 축소되었다. 이것이 더욱 심화되어 오늘날에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색이 바래어 버린 먼 꿈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차면 기우는 자연의 이치는 어긋남이 없어서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이제는 다시 사람들이 역으로 과학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기 시작하고 있다.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자연의 베일이 거의 다 벗겨져서 조금만 더 탐구하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될 줄 알았는데, 계속 자연을 탐색하여 지식이 늘면 늘수록 “어, 이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들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양자역학에서 도출되는 결론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험을 통해 습득하는 지식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새로운 연구결과들은 과학 기술의 속성상 ‘수’와 ‘수학공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수 안에서 수 이상의 의미를 감지하고 그 숨긴 뜻을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양자물리학이나 천체물리학에서 등장하는 수를 접할 때 과학 기술자들이라 하더라도 그냥 피상적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 수가 곽노순 목사의 「우주의 파노라마」에서는 살아 움직인다. 지은이의 붓끝에서 술술 흘러나오는 글을 보노라면, 수들이 절묘하게 춤추는 것을 볼 수 있다. 춤추는 것을 보다가 어느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를 들썩이고 고갯짓을 하면서 우주와 주변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무심히 지내면서 미처 몰랐던 부분들을 알게 된다. 수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서 극미세(極微細)의 세계를 손에 잡힐 듯이 현실감 있게, 그리고 초거대(超巨大)의 우주를 바로 앞에 놓고 보는 듯이 입체감 나게 묘사한 부분들은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멋진 그림들이다.
이 그림을 형이상학적으로만 느껴지기 쉬운 성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득력 있게 해설하는 지은이의 솜씨는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한다.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처럼 우주의 파노라마가 장대하게 펼쳐지면서 성서의 말씀이 우레와 같이 울리니, 사라졌던 하느님께서 바로 옆에 다시 나타나시는 듯하다. 현대판 파노라마 화면에 고대판 해설이 멋들어지게 어울려 조화를 부리고, 과학의 영상에 전설의 음성이 어우러져 살아 숨 쉰다.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우주의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운행과 극미세와 초거대가 하나로 꿰뚫려 조직되어 있는 오묘함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창조주와 함께 우주를 거닐고 있는 우리를 본다. 우리는 창조주의 품안에서 노닐면서 그의 가없는 사랑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의미임을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주가 우연히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눈 녹듯이 사그라지고, 오히려 이 세계에 대한 경외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먼지 하나 실오라기 하나 헛되이 쓰인 것이 없이 모두 있을 곳에 있으면서도 서로 하나도 어긋남이 없이 정확히 들어맞게 움직이는 이 정교한 걸작품이 어떻게 우연히 생겨난 것일 수가 있겠는가? 「삼일신고」에서도 보면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다. 이런즉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살게 된 것도 어쩌다가 그냥 우연히 생겨나서 목숨을 영위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라 하신 것처럼 태초부터 계셨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계실 것이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 옆에 함께하셨으니 하느님의 존재와 일상생활이 별개가 될 수 없다.
영화를 통해 과학과 종교가 하나로 합일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부처님의 인과응보의 가르침이나 예수님의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들이 단순히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예외 없이 적용되는 우주의 법칙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굳이 그 차이점을 들자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물질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고 인과응보의 법칙은 인간세계에 적용되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법칙이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이유는 이 가르침을 몸으로 배우기 위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멋진 영화를 감독한 지은이는 이독제독(以毒制毒)의 전략을 절묘하게 구사하여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흐릿해졌던 하느님의 광채를 과학으로 다시 밝게 빛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지은이의 성서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현대물리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양 극단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누벼 시공을 뛰어 넘으면서 이룬 것으로,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러한 글을 쓰는 데는 그 누구보다도 지은이가 바로 적격이었다는 생각이 더욱 들게 된다. 성서가 단순히 신앙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에서 벗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스며들어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로 깨어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에게는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모든 문제는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로 귀결된다. 내가 있어 문제가 일어나고 우주가 내 의식 속에 존재하게 된다. 책의 말미에 있는 물음, 진실로 예수는 누구이며, 이렇게 묻는 나는 누구인가? 이 화두에 대한 선문답(禪問答)을 솜씨 좋은 지은이로부터 듣고 싶다. 또 한줄기의 신선한 바람을 기다리면서.
김용호(성공회신학대)
망막한 어둠이 꿈틀거리던 카오스, 그 공허와 무의 틈을 비집고 거대한 폭발이 시작되었다. 우주의 탄생, 빅뱅의 순간이다. ‘혼돈하고 공허한’ ‘흑에 덮힌 깊음’(창세기 1장2절)에서 하느님의 첫 창조가 이루어지는 찰나다. 어째서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 있을까? 양자역학은 공간과 시간의 크기가 0 에 접근할수록 무한대의 에너지를 담지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그것은 무가 유를 창조할 수 있는 무한대의 우주적 기운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곽노순 교수의 「우주의 파노라마」는 천문학, 양자역학, 성서를 연결시키며 이렇게 질문한다. 최초의 공허에서 억조창생이 일어났다면, 하느님은 무엇인가? 그는 무(無)의 대양 바깥에서 어떤 조화를 부려 빅뱅을 일으킨 것인가? 저자는 이렇게 해법을 찾는다. “하느님에게 우주의 ‘안과 밖’이란 구별이 적용될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그분의 형상을 본떠 복제했다는 인간도 우주의 내적 관찰자이다.”
곽노순 박사가 해박한 물리학과 천문학 지식, 그리고 동양적 지혜를 끌어 들이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첨단과학으로 확장된 세계 속에서 하느님–예수–인간의 관계는 어떻게 새로이 보아야 할 것인가’이다. 그것은 근대 기독교가 가르쳐왔던 ‘저 위의 하느님’과 ‘이 땅에 머리 조아린 인간’의 개념을 혁신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책 말미에 그는 첨단과학시대의 기독교인이 반추해야 할 화두를 다음과 같이 던진다.
“아마도 지중해 동편에 출현한 나사렛 예수의 뿌리는 2천 년이 아니라 우주가 탄생한 2백억 년 전으로 거슬러 가는 듯하다. 무의 대양에서 생겨나 지금 4차원으로 팽창하고 있는 1천억 은하의 창조세계는 현란하고, 그 가운데 태양계 세 번째 행성을 들러 간 이의 발자취는 영롱하기만 하다. 그는 중생들이 생겼다 풀어졌다 하기를 되풀이하는 이 망각의 바다 위를 비추고 있는 달빛이런가? 진실로 그는 누구이며, 이렇게 묻는 나는 누구인가? 이 화두에 복이 있을 지어다.”
과학에 의해 종교가 위축되었던 근대사를 마감할 무렵인 1970년대 카프라(F. Capra)를 비롯한 일부 물리학자에 의해 동양종교가 첨단과학의 뒷받침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여전히 신앙의 영역으로만 간주되었다. 곽노순 박사는 그 20년 후 신구약성서의 말씀에 첨단과학의 생명력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종교와 과학이 합일할 길을 연 셈이다. 그가 다루고 있는 것은 조직신학 등의 신학적 차원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다. 그것은 무리한 논리적 추론을 중간에 개입시키는 사변을 거부하고, 말씀 그 자체와 첨단과학의 사고를 직접 대면시키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는 성서의 말씀에 초현대적 생명력을 부여한다. 더욱이 그는 천문학적 지식을 활용하면서 예수와 우리 자신의 관계를 태양과 지구와 은하가 생성소멸하는 전우주적 사건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과학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하느님-우주의 일부이며,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우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선사한다.
이 책에 인용된 방대하고도 전문적인 지식에 비해 그것을 푸는 방식은 시적이거나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투이다. 따라서 물리학이나 천문학의 초심자라 할지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제 종교를 과학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이성과 분리된 신앙만을 고집하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첨단과학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소립자 세계 안에, 거대한 우주공간 안에, 그리고 그 응결체인 우리 자신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이 기존의 종교제도에 어떤 파장을 미칠까?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갱신을 요구할까? ‘후기기독교’를 전망하는 곽노순 교수가 「우주의 파노라마」를 통해 암묵적으로 묻는 또 하나의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