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순의 성서해설
곽노순의 성서해설
9 서설
19 창세기 Ⅰ
27 창세기 Ⅱ
37 창세기 Ⅲ
47 창세기 Ⅳ
57 출애굽기 Ⅰ
66 출애굽기 Ⅱ
72 레위기
81 민수기
91 신명기
99 여호수아
107 사사기
116 룻기
125 사무엘상
134 사무엘하
141 열왕기상
149 열왕기하
157 역대기상하
164 에즈라 · 느헤미야
172 에스더
180 욥기
190 시편
199 잠언
이 시대에 살아계신
그분과의 만남을 경험케 하는 성서해설서
” 왕릉에 올라가 몇 번 뒹굴었다고 해서 고고학을 한 것이 아니며
석탄이나 석유에 불을 지핀다고 해서
고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몇 번 떼었다거나 절수를 얼마 암송한다고 해서
이 ‘여러 천 년 묵은 책’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 “
라는 일성으로 첫 페이지가 열린다.
“자기들은 타국과 다를 게 없을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지지리 못난 민족이지만 선조 하나 잘 만나 그이의 덕으로 하느님의 총애와 사랑의 채찍을 체험했노라는 증언”이 바로 구약이며, “자기들이 죄인이요 보통사람들인데 메시아가 생존하던 시대에 태어난 덕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겨웁도록 몸으로 느꼈다는 증언”이 신약이라고 저자는 한 마디로 정의를 내린다.
글자로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서의 옛인물들이 “우리처럼 숨 쉬고 먹고 자고 기동하며 울고 웃는” 살아있는 인간으로 만나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배후에는 ‘일차적 주동자’로서 ‘살아 계신 하느님’이 있으며, 밤의 못이 현란한 것은 그 속에 달이 떠있기 때문인 것처럼,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람이 ‘고쳐지는 것’은 사신 하느님이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성서가 ‘살아 있는 책’임”을 곽목사는 밝힌다.
성서를 열기 전에
첫째, 성서는 “예순여섯 권 모두가 ‘땅이 평평하다’고 보던
그 옛적에 기록된 고대문헌임”을 잊어서는 안 되고,
둘째, 성서를 여는 사람은 “교리 몇 조각”에 얽혀서는 안 됨을 역설한다.
“한약을 통재로 끓여 마시듯이
성서의 매 페이지에서 우러나오는 국물을 마셔”
그 안에 “뿌옇게 깔려 있는 구름에서
어느 날 천둥치는 소리를 듣고 비가 되어 내리는 것에
촉촉이 몸을 적시는 복”을 받으라고 손짓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편지를 쓴 바울은 지금의 복음서를 읽지 못했으며 예수는 물론 신약의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셨으며 다윗은 예언서를 읽지 못했고 아브라함은 출애굽이나 그 이후를 알 리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글자나 책에 얽매이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래야 “옛사람들이 자기들의 문제들과 씨름하는 동안 사신 하느님을 만난 것처럼 우리는 우리들의 문제와 씨름하는 동안 이 시대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글에도 매일 수 없고 그때그때 자유케 하시는 신과 영에게만 사로잡혀야” 하기 때문이다.
곽노순 목사와 함께 “창세기”부터 “잠언”까지 읽어가면서, 우리는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무거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마음껏 묻게 되고, 이해에 이르러, 끝내 “옛사람들의 기록 일부가 오늘날 유용한 자원이 되어 수많은 영혼에게 불을 지피어 조화를 부리게 되는 것”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