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네쌍스는 종교와 과학이 합일하는 21세기,
새 시대의 창을 열어드립니다.
∙ 1938년 서울에서 출생
∙ 연세대학교 물리학과와 한국신학대학 졸업하고
∙ Southern Methodist University에서 석사학위(S. T. M.)와
∙ Hartford Seminary Foundation에서 철학박사학위(Ph. D.)를 받았다.
∙ 신구교 공동번역성서 구약번역위원이었으며
∙ 시카고의 샤론연합감리교회에서 목회한 후
∙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에서 가르쳤다.
∙ 현재는 후기기독교 신학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영성 수련 소그룹들을 지도하고 있다.
목사 곽노순
곽노순 목사를 만나 앉은 자리에서 9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진기자와 나눈 첫 마디는 “정말 9시간 맞아?”였다. 그쯤 되면 몸이 배배 꼬이거나 몰래 하품을 삼키다가 눈물을 찔끔거릴 법도 한데 그 시간이 정말 꿈처럼 지나갔다. 이 글은 인터뷰라기보다는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른 채 넋을 잃고 들은 말의 기록이라 해야 옳을 듯하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적어도 10분 간격으로 한 번씩 웃음이 터지거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예민한 혼을 가진 이라면 까닭 없는 눈물에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할 것이다. 그의 말은 무엇보다 아름답고 재미있다. 처음에는 너무나도 시적인 말의 ‘껍데기’에 사로잡혀 그걸 곱씹느라 멈칫거리다가 나중에는 생각을 놓은 채로 그저 듣기만 하게 된다.
그는 올해 쉰아홉. 작은 키에 유난히 희고 윤기 있는 피부, 하얀 머리카락, 하얀 속눈썹,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눈빛, 힘차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를 가졌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해탈한 그리스도인’ 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자 하니 이렇게 운을 뗐다. “내가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는 꿈을 꾸는 중인데 대전에서 깼건, 용산에서 깼건, 깼으면 됐지, 어느 역에서 깬 건 왜 물어요? 꿈꾸는 중에 알록달록 재미있는 게 뭐냐고 묻는 건데…”
그는 어렸을 때 아주 ‘멍하고 어벙한’ 아이였다. 사리분별이 느리고 눈치가 빠르지 못해 아버지로부터 늘 ‘분발하라’는 말을 들었다. 학교에 가면 첫 시간부터 끝 시간까지 화장실 한 번 안가고 앉아 있을 정도로 움직이는 것을 싫어했다. 국어는 맡아 놓고 빵점이었는데 비에 대해서 쓰라고 했을 때도 단 한 줄밖에 못 썼다. “밖에 지금 비가 온다.” 비가 온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두 살 때는 두 가지 특이한 경험을 했다. 전쟁을 당해 제주도로 피난을 가던 겨울, 어느 역에서 100원 짜리 가마니를 덮고 눈을 피하다가 얼어 죽을 뻔했다. 새카만 터널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데 너무 아늑하고 좋아서 자꾸 그 쪽으로 가고 싶었다. 형이 뺨을 때리며 자신의 이름을 한참을 불러서야 깨어났다.
또 한 번은 혼자 밥을 먹는데 갑자기 음식 씹는 소리가 귀청을 울릴 만큼 크게 들리면서 ‘지금 내가 먹고 있는 것이 다 남의 살인데 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은 음식을 못 먹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는 논리가 그렇게 좋아서 대학도 연대 물리학과를 택했다. 2시간이 넘게 양자역학 문제 하나를 풀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곤 했다. 길거리를 가다가 숫자만 보여도 가슴이 찡하고 두근거릴 만큼 수학과 논리를 ‘신봉했다’. 인문학은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증오했다. 누가 인문학 한다면 속으로 “사내새끼가 조류야? 입으로 먹고 살게.” 할 정도였으니까. 또 하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사랑’이었다. 교회에서 ‘눈이 둥그런’ 한 여학생을 만났는데 첫눈에 그렇게 좋아서 6년을 사랑했다. ‘사랑했다’는 표현 외에는 아무것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
“그런데 내가 대학 졸업하기 석 달 전 그만 세상을 떴어요. 어벙하던 아이가 논리와 사랑에 눈떠서 그것밖에 모르고 살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요.”
길거리에서 붉은 입술의 여자만 보아도 골목에 들어가 토하곤 했다. 너무나 생생하게 사랑하다가 죽음을 만났기 때문에, 아름답고 고운 것일수록 더 큰 비극을 예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걸을 때마다, 신은 있는 건지,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속에서 ‘이 비겁한 놈아. 죽어야 되지 않냐?’ 고 소리칠 때마다, ‘지금 죽으나 백년 후에 죽으나 나중에 만나기는 마찬가진데 도중에 삶이 뭐고 이 우주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고나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잠재웠다.
부흥회를 참 많이도 쫓아다녔다. 신당동의 한 교회부흥회에 참가했을 때다. 일주일 동안 아무 감동도 못 받았는데 마지막 축도할 때 이상한 경험을 했다. 너무나 절박한 상태로 웅크리고 있는데 갑자기 수십만 볼트나 될 것 같은 전류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의 온몸을 관통한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덜덜 떨렸다. 수줍음을 워낙 많이 타던 때라 옆에 있던 사촌동생이 볼까봐 이를 악물고 참으려 했는데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두 가지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하나는 내 죄가 홍수에 쓸려가는 영상이고 또 하나는 마지막 세포까지 타인을 위해 살다가면 자족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어요. 밤 10시쯤 교회 문을 나서는데 건물 벽돌의 작은 무늬 하나까지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서 동생한테 오늘은 왜 이렇게 환하냐, 불꽃놀이라도 하나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해서는 ‘너 안 죽으려고 갖은 재주를 다 피우는구나. 연명할 구실을 찾느라 별 환상을 다 만들어내는구나.’ 하며 석 달을 싸웠다. 악몽에 시달리는 것이 너무 괴로워 어느 날은 엎드려 중얼거렸다. “저를 이대로 잠들게 해 아침 네 시에 깨워주시면 당신을 찬양하겠습니다.” 한 10분쯤 잤을까. 누군가 발을 세 번 걷어차 눈을 뜨니 새벽 네 시였다. 그날 밤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은 스크린을 보듯이 깨끗하게 잤다. 석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런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결국 한국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열두 살 때 제주도로 피난을 갔을 때다. 다시는 고향에 못 돌아올 것만 같은 생각에 전신주를 붙들고 기도했었다. “내가 여기서 살 던 게 옛 이야기가 되게 해주시면 제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하느님이라는 낱말을 넣고 함부로 이야기할 게 아닙니다. 우리는 결국 찰나를 살다 가는 건데 그 와중에 생명체가 전체에 대해서 어쩌고저쩌고 했다면 그게 꿈이거나 욕이거나 기도거나 간에 다 메아리를 갖는 거지요. 매번 어려울 때마다 똥끝 타니까 하느님 어쩌고 하다가 머리가 좀 컸다고 신은 없다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그 약속에 붙들린 거지요.”
그는 붙들린 이후에도 늘 도망갈 구실만 찾았다고 한다. “그래도 조금 더 배워서…” 하며 신학대학으로 도망갔고, 대학을 마친 후에는 또 여러 사람 앞에서 설교하는 게 죽을 맛이어서 ‘그래도 박사 정도는 해야…’ 하며 미국으로 ‘내뺐다.’ 고등학생 때 봉사부장인가를 했는데 자기를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동자에 놀라서 주저앉을 정도로 그는 수줍음을 많이 탔다.
박사과정을 밟다가 잠시 귀국해 한국 신구교 공동번역성서의 구약번역위원으로 성서를 번역했다. 그때가 삼십대 초반이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머리카락과 속눈썹이 하얗게 변했고, 그토록 시를 증오했는데 이상하게도 하는 말마다 시가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공부하던 중 함께 성서번역을 했던 문익환 목사의 구명을 호소하는 글을 썼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13년 동안 고국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별수 없이’ 시카고에서 교민들을 상대로 10년 간 목회를 했다. 처음 5명으로 시작한 신도수가 75명을 넘으면 너무 많다고 ‘잘랐다.’ 일주일에 15분 동안 설교하는 것 외엔 그의 교회에는 성가대도 없었고 새벽기도도 안하고 심방(신도 가정 예배)도 안 갔다.
그는 처음 온 사람들한테 ‘4불(四不)’이라는 것을 시켰다. 성경 읽지 말 것, 기도하지 말 것, 전도하지 말 것, 봉사하지 말 것, 대개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데 실제로 4불을 안 지키면 그는 무섭게 야단을 쳤다.
“진짜 본심을 가지고 살아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열 장씩 읽다가 하품하고 자면서 성경 읽는다 하고, 자기 가는 길도 확실하지 않으면서 전도한다 하고, 자신이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기도한다고 하지요. 봉사? 웃긴다고 그랬습니다. 평소에는 남 생각 하나도 안하다가 생색내려고 하는 봉사가 무슨 소용 있습니까? 행위를 다 잘라버리면 별수 없이 존재를 다루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왜 여기는 심방도 안 가요?’ 하고 물으면 “목마르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아야지 우물이 어디 쫄랑거리고 다니냐?” 하고 나무랐다. 그러는 동안에 신도들은 다 어린아이로 변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다들 ‘헐렁해졌다.’
“목회를 통해 사람들을 보니까 겉으로는 넥타이 매고 으스대지만 어려울 때 만나면 다 어린아이예요. 속에서는 다 울고 있고 다 외로워하고 있어요. 길을 못 찾으니까 겉으로는 서로 꼬집고 원망하지만 그 중심에서는 다 헐벗고 불쌍한 한 조각 혼입니다.”
그가 교인들에게 약속한 것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삶을 마감할 때에 웃을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 “슬픈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기쁜 것이든, 다 좋은 학교다. 정말 넉넉히 경험했다.” 하면서 갈 수 있게. 간혹 신자가 목사에게 왜 그리 불친절하냐고 입을 삐죽거리는 이가 있으면 냅다 호통을 쳤다, “친절을 원하우? 여기는 생사에 대해서 수술해주는 데고, 죽을 때 웃게만 해주는 곳이니 기타는 기대도 하지 마라!”
그는 87년에 귀국해 89년부터 재작년까지 꼬박 7년 동안 목원대학에서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너무 튀어서’ 내보내려 하고 학생들은 매번 안 된다고 데모해 내내 학교가 시끄러웠다. 요즘은 시카고와 천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낸다. 시카고에는 매년 목을 빼고 그를 기다리는 가족과 제자들이 있고, 한국에는 목원대학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매주 그에게 찾아와 ‘놀다가는’ 이들이 여럿 생겼다. 그는 찾아오는 이들을 만나고 부르는 곳에 달려가 “그거, 그거, 도무지 그거라고 부를 수 없는 유일한 그것”을 가르치고 또 글을 쓴다.
그의 집을 휘둘러보면 몇 가지, 여느 집에서는 보기 힘든 것들이 눈에 뛴다. 검푸른 하늘에 뿌려진 별무리 사진, 달력마다 빼곡히 들어찬 이상한 기호, 열을 지어 가지런히 놓여있는 작은 돌멩이들. 달력에 있는 기호는 별자리를 표시해 둔 것이고 세계 각국에서 가져왔다는 돌멩이는 돌 기운을 느끼며 수련할 때 쓴다. 세상에 별을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마는 그와 함께 있으면 유난히 별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그는 길을 가는 데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내 힘이 부족해서 석가나 예수 등의 구체적인 힘을 입는 단계, 그 다음에는 대화하며 함께 가는 단계, 마지막에는 그가 은인임을 잊지 않되 내 길을 걸어 자기의 꽃을 피우는 단계이다.
“석가나 예수나 결국은 ‘태어났다 죽는 놈을 어떻게 도울까?’ 하는 것인데 스님들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에게 ‘자력구원하세요’ 하고 말하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은 물에서 건져줘도 돌아보면 다시 빠져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이에요. 마지막 자기 꽃을 피우는 단계가 도교라고 봐요. 굳이 표현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것은 도가적인 기독교쯤 되요. 교리가 덜 중요시 되는 어떤 것, 조직이 덜 중요시 되는 어떤 것,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지난 2천 년 동안 그 구실을 다 했어요. 교회나 절은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사라질 겁니다. 이제 조직이 없고 그냥 존재만 다스리는 시대가 와요. 우주의 여러 싸이클이 하나로 겹치면서 지구는 현재 해체 기간에 들어 왔어요. 올해는 그 정점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87년 8월부터 시작되었어요. 그때부터 기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 강도가 매년 높아지는 게 우연이 아닙니다. 지구 자체가 이제 긴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거지요. 지금은 김씨, 이씨의 득도와 각(覺)이 아니라 지구 전체가 각(覺)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시대예요.”
그는 이런 ‘겁나는 말’을 무슨 농담하듯이 한다.
“새 시대는 경외와 함께 아이 같은 명랑함, 장자와 같은 가벼움, 유머, 평화와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용서와 사랑을 강조했어요. 그런데 용서는 불화와 죄가 전제되어야 하고, 최고의 사랑은 자기 발로 당당하게 서게 해서 같이 노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회개와 속죄만 하고 있을 겁니까? 언제까지 계속 죄의식에 시달리게 할 겁니까?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것은 공중으로 뜨기 위해선데….”
그의 말대로 우주가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시대가 그러하다는 걸 알고 그냥 기쁘게 살라!’ 고 한다.
“라즈니쉬만 해도 낭만주의 시대에 살았어요. 이것저것 여러 종류의 전통을 써서 비빔밥을 만들고 팥죽을 쑤고 즐기다 갔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즐길 새가 없어요. 이제 다 알지 않느냐 이겁니다. 마치 모른다는 듯이 머리 싸매고 연구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이웃 사랑해야 한다는 것, 매순간 즐거워야 된다는 것, 지구를 살려야 된다는 것, 너무나 간단한 건데 그걸 못해서 두꺼운 책이나 쓰고 회의나 하고 그러잖아요. 굳이 석가나 예수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 뱃속 들여다보면 다 알아요. 사람이 왜 진리의 말을 들으면 감동합니까? 그것은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존재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어서 다만 ‘메아리’로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도 몰라서 사람 죽인 양, 몰라서 4천억씩 해먹은 양 능청떨지 말자는 겁니다.”
그가 목원대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한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교수님 같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 웃지요. 나처럼 하려면 그 비애스러운 것을 다 체험해야 하는데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왜 뭘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냥 살면 됐지. 나는 재난이라는 화두를 통해 하늘을 만나게 됐는데 그 재난이 내가 만든 겁니까? 자연스럽게 생의 경험이 하늘을 찾게 되어 있지 일부러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는 석가, 노자, 장자, 천부경, 강증산 등을 종횡무진하면서 예수를 ‘소화해’ 한국적 토착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강증산을 말할 때는 ‘토종 예수’라는 표현을 썼다. 그의 글을 읽고 간혹 “그럼 누구를 믿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물어오는 이도 있다. 그러면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허구적인 물음이다. 아직 믿지 않는 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어져서 좋은 것이요,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같음을 발견하니 손해 볼 게 없다. 하늘에 태양은 하나이나 수천수만의 남녀들이 그대는 나의 태양이라 고백하지 않는가. 종교는 결국 믿는 비즈니스가 아니라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두려워하랴!”
최근 들어 여기저기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이 자주 오는데 그는 강의를 할 때면 ‘기(氣)수련’을 병행하곤 한다. 간혹 기를 직접 느끼고도 쭈뼛쭈뼛 이렇게 물어오는 이들이 있다. “저, 목사님, 이거 이단 아니에요?”
곽노순 목사는 글을 잘 쓴다. 그의 말이 그렇듯이. 시처럼 아름답고 영화처럼 장대하지만 읽는 이를 감정 속에 가두지 않고 그 혼을 건드려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글이다. 지식이 아닌 존재의 변화를 절절히 체험한 이에게서 나오는 힘이리라. 그래서 그의 글에 반한 이가 여럿이다. 미국에서 목회할 때 ‘순전히 교회 주보 메꾸려고’ 썼다는 <신의 정원>을 두고 누군가는 “성경 옆에 두고 읽는, 감당키 어려운 힘을 가진 위험스러운 책”이라 했고, 또 다른 이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읽다가 깜짝 놀라 무릎 끓고 읽었노라고 했다. 어느 글에선가 곽노순 목사는 예수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혼으로 몸을 밀고 간 투혼의 사람!”
■ 위 글은 1997년도에 잡지 「건강 단」에 기재되었던 인터뷰 기사입니다.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