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7월 피라미드의 눈
Ⅰ
천주교인과 루터교인이 골프장에서 만났다. 서로 얼마간 친해진 다음 천주교인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말이요, 마틴 루터가 태어나기 전에 댁의 종교는 어디 있었소?”
야유를 받은 루터교인은 한참 하늘을 바라보더니 되묻는다.
“댁은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하셨소?”
“물론 했지요.”
“그러면 세수하기 전에 댁의 얼굴은 없었소?”
지금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는 과거 어느 때에는 아직 안 생겼을 것이다. 불교도 그렇고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모슬렘교도 어느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우리는 상식적인 이 사실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이로써 창시자에 대한 고마움을 지닐 수 있고, 또한 절대화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른 한편, 아무리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인간 종자는 우리의 ‘얼굴’과 같은 종교적 심성을 지녔을 것이다. 원초적인 의식과 덜 발달한 언어를 지녔을 석기시대나 빙하기 인류의 종교는 어떤 양태였을까? 이런 물음은 문명 발생 이후에 생겨난 우리들 종교의 경직성을 깨고 보다 풍요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들은 기도나 명상을 했을까? 그럴 리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나 명상은 인간 언어가 극도로 발달하여 언어의 무거운 내용이 인간 혼을 짓누를 때, 동물들의 울부짖음이나 식물들의 침묵을 모방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어 사용 이전의 인류는 어떤 방식으로 종교성을 표출했을까? 근년에 인간 이외의 포유동물도 꿈을 꾼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어쩌면 우리 선조들은 꿈에서 본 영상과 끈끈한 상징을 춤이나 그림으로 표출하지 않았을까?
곧, Dreaming, Dancing, and Drawing 이라는 3D가 최초의 표현 매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규칙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으로 접어두나, 돌기적인 사태는 눈여겨보는 호기심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그 고장에 이제껏 없던 진기한 짐승이 나타났거나, 차 있던 달이 기울거나, 난데없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는 별을 바라보거나, 계절에 따라 자리를 옮기는 별을 알아차렸을 때 이런 이변이 그들의 생존에 위협이 될지 안전할지에 관심할 것이고, 이런 변칙현상이 자극이 되어 꿈을 꾸게 된 사람은 그 내용을 춤이나 그림으로 동료들과 나누었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꿈의 내용과 그들 생활 주변에서 전개되는 사태 사이에 의미 있는 상관성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길과 흉’을 점쳐 안심하거나 수용할 자세를 마련하게 되었으리라.
그리고 낮의 세계에서는 알 수 없는 정보를 꿈을 통해 제공하는 그 미지수의 주체를 ‘신'(神)이라 이름 붙이기 시작했을 것이다. 곧, 자연 속에 일어나는 우연적인 요소와 인간 의식 속에 내재한 우연스런 표출방식이 양손으로 손뼉을 치듯 마주쳐 종교를 일으켰음직하다. 곧, 태고의 종교는 점(占)이라는 아날로그식 기술이다.
그러면 신이란 자연 속의 우연과 인간 혼 속의 우연에 동시성을 제공하는 어떤 기능인가? 아니면 인간도 대자연의 품에서 나온 물상이기에 동시성은 그냥 발생할 수 있는 건가? 신이란 기능도 자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건가? 아니면 신은 대자연의 근원인가? 어느 것이 우선하는 것인가? 그저 혼몽할 뿐이다.
Ⅱ
철학자가 산행을 하다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상대의 몸을 위 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장님이 어두운 방에서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찾는 중이군.” 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기가 막혀서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있지도 않은 고양이를 찾는 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보아 하니 그걸 찾으신 모양입니다그려.”
우주의 궁극적 진리는 인간 두뇌로 파악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인류의 탐구는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를 더듬는 처지인지 모른다. 그러나 양자역학은 전자가 관찰되기 전에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수학적 표현을 도출해 놓았다. 관찰행위가 혼성적인 가능태를 함몰시키고, 한 장소의 현실태로 낙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면 150억 년 전 초미니우주가 ‘무의 대양’에서 현실태로 출현했다면 그때는 누가 관찰을 한 것일까? 그 관찰자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때는 공간도 시간도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니, 분명 어디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주와 인간이 현실태로 엄존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있지도 않은 검은 고양이’는 우리들이 꿈속에서 잠을 자거나 명상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있듯이, 아마도 태허의 가능태 속 가능태에 숨어 있지 않았을까?
우리들이 밤마다 꾸는 꿈은 낮의 실재와 비교할 때 일종의 가능태요, 그 속에서 잠을 자거나 명상을 하는 ‘그’ 내가 눈을 뜨고 ‘이’ 나와 눈이 마주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 ‘이’ 나는 사라져 결국 꿈을 깨고 말 것인가, 아니면 ‘그’ 나에 의해 관찰되었으니 새로운 종류의 현실태로 승화할 것인가?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존재론적 우위를 갖는 것일까? 가능태의 세계 내에서는 중동의 신화들이 전제하듯 달이 누이로서 남동생 해보다 선재할 수 있기에 이렇게 묻는 것이다. 셋째 날에 식물이 생기고, 그 다음날에 태양이 하늘에 걸렸다는 성경의 모순적인 표현도 바로 가능태를 암시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간이 생긴 이후 현실태에서는 태양이 단연 달이나 식물보다 선재해야겠으나, 소립자의 세계나 꿈과 같은 가능태에서는 그림자와 실재 사이에 일정한 인과율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두 개의 나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실체성을 지니는 것일까?
노인이 다시 응대한다. “허참, 젊은이, 내가 내미는 물그릇을 뒤집어 쏟는구먼. 눈을 뜨라는 말이지. 눈을 뜨고 방에서 나와 산을 헤매다 보면 호랑이와 눈이 마주칠 날이 있겠지.” 그리고 표표히 산등성을 넘어 사라진다. 필시 도인인 그 할아버지는 어떤 체험을 한 것일까? 그는 내면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호랑이, 곧 나와 우주를 있게 한 가능태 속의 가능태와 눈이 마주쳤는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야 사람의 속을 꿰뚫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1달러 지폐 뒷면에 그려진 피라미드의 눈이 떠오른다.
Ⅲ
한 인디언 추장이 있었다. 그는 젊은이들의 힘을 떠보기 위해 어느 날 산 오르기 대회를 열었다. 해 질 때까지 누가 가장 높이 올라갔다 오느냐 하는 내기였다. 그래서 4명의 젊은이가 대표로 선발되어 새벽에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자 그중 하나가 전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도착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그가 산 어디쯤 올랐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얼마 후에 두 번째 젊은이는 소나무 가지를 들고 왔다. 그리고 셋째 번은 고산지대의 관목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마지막 젊은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지만 사방이 어둑어둑해지는데도 그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달이 중천에 떠오를 때 쯤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 추장이 물었다.
“너는 무얼 가져왔느냐? 어디까지 올라갔느냐?”
“네, 제가 간 곳에는 나무도 없고 그저 바위와 눈과 황량한 땅뿐이었습니다. 발은 찢겨졌고 기진맥진해서 이렇게 늦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저는 푸른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는 시합에는 졌지만 누구도 뺏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흐뭇함을 상으로 얻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는 대규모의 전쟁으로 얼룩졌음에도 불구하고, 일천 개나 일만 개의 별이 아닌 2000억의 1000억 배의 별을 계수하고, 삼천 년이나 전설적인 반 만 년이 아닌 100 억 년이 넘는 시간폭을 입에 올리고, 팽창하는 우주의 실상을 눈치 챘고, 생명의 암호가 주역의 괘처럼 64개의 조합을 산출할 4개의 염기로 되었음을 파헤쳤으니 가히 인류의 전역사를 통해 산 정상에 올라 바다를 본 시대라고 할 만하다. 아마도 닐 암스트롱은 ‘돌멩이와 흙더미 몇 자루 밖에 가져오지 못했지만, 우리들은 지구를 보았습니다. 검은 공간을 배경으로 푸르고 흰 공이 유유히 도는 것을 우리들 눈으로 보았습니다’고 말했음직하다. 과학의 발전과 영성의 개화는 두 나래와 같은 것이니, 이제 2000년대에 발을 들여놓은 인류는 내면세계의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일 때까지 높이 올라야 할 것이다.
인류의 정신사에는 이미 그 바다를 본 선각자들이 있었다. 만쑤어라는 이슬람의 쑤피 도인이 십자가에 달려 처형당할 때 수많은 군중이 몰려와 욕설을 퍼부으며 돌을 던졌다. 그때 그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발과 양손이 잘릴 때 만쑤어는 하늘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하느님, 저를 속이실 수 없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속에 계시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게 살인자로 오십니까? 원수로 오십니까? 저를 속이지 못합니다. 이미 제 속에서 당신을 보았기에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저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의식 내면에 있는 이중(二重) 가능태의 상봉을 증언하고, 뭇 인간들 속에도 동일한 조우가 배태되어 있음을 투시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