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와 정치

도(道)와 정치

 

예수보다 300 여 년 전에 쓰여진 고서 『장자』를 열어본다. “경상초”라는 인물이 “노자의 도의 일부분을 체득해 가지고 북쪽으로 가서 외류산에 들어가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하인 중 똑똑하고 분별력이 있는 자는 보내고, 하녀 중에서도 고분고분하여 마음이 착한 사람은 쫓아 버렸다. 그리고 무뚝뚝한 사람들과 같이 살며, 순박한 사람들만을 부리고 있었다.” 어째서 그는 ‘똑똑하고 착한 사람’을 뽑지 않았을까? 이는 구름처럼 모여온 3만2천명의 이스라엘 자원병 가운데서 무서워 떠는 장병 2만2천명을 돌려보내고도, 다시 물가에서 물을 마실 때 무릎을 꿇고 먹는 자들 말고 짐승처럼 혀로 물을 핥는 자들만을 추려내는 신의 결정에 비견되는 것일까? 아니면 의로운 자들 말고 죄 있는 자들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의 계획과 통하는 것일까?

“이렇게 해서 3년이 지나고 보니, 외류산 일대 사람들의 생활은 아주 풍족해졌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했다. ‘저 경상 선생이 처음 이사해 왔을 때, 우리는 놀라고 이상히 여겼었다. 그러나 그 후 우리들의 살림은 하루하루의 수입을 계산하면 분명 모자라건만 일 년을 통해 계산해 보면 남아돌아가게 되었다. 그 분은 성인이 아닐까. 우리 한번 그 분을 시축(尸祝)처럼 받들고, 사직(社稷)의 신으로서 모셔 보지 않으려는가.'” 이는 이삭이 파놓은 우물마다 본토민들이 시비를 걸어 빼앗는데도 옮겨가 다시 팔 적마다 샘이 나고, 더욱 번성해지자, 신이 그와 함께 하시는구나 하는 인식이 원주민들 사이에 동튼 것과 흡사하며,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원천이라 하는 개념과도 한 가지이리라. 여하튼 경상초는 한 고을을 대상으로 목자가 양을 치듯, 농부가 농사를 짓듯 목회를 펼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는 초월자와 통하는 이런 목자, 이런 농부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리고 본인으로서는 누군가로부터 배운 바를 실행에 옮겨보는 것일 게다.

경상초는 고을 사람들의 제안에 대해 무어라 할까? 그는 “그 말을 듣자, 남향해 앉은 채 무엇인가 석연치 못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수상히 여겨 물었더니, 그가 말한다. ‘너희들은 왜 나를 수상쩍게 여기느냐. 무릇 봄기운이 돌면 온갖 초목이 싹트고, 가을이 되면 모든 열매가 영근다. 그러나 봄이나 가을이라고 해서 자연의 법칙에 의거하지 않고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겠느냐. 이 마을이 풍족하게 된 것도 천도(天道)가 작용한 탓이며, 나 때문인 것은 아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얻은 이익과 스승의 존재를 연결시키는데, 정작 스승은 오히려 봄, 가을이 일으키는 식물들의 신비와 인간들을 포함하는 만유를 운행하시는 하늘의 길(天道)에 시선이 가 있다. 그는 사람들의 떠받듦에 넘어가지 않고, 천지간에 자신의 위치를 보존한 것이다. 경상초는 “나라가 작고 백성이 적으면 감화시키기 좋다”는 노자의 지침을 따른 것이요,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도 자기의 공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의 공로라고 자처하지 않기 때문에 공은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는다”는 노자의 천지자연을 본받은 것이 된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 분의 가르침의 일부를 체득하고서 밖으로 뻗어나가 복음의 공동체들을 일굴 때에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고 묻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모범적인 사례만 있을 리 만무다. 더구나 종교집단이거나 밖이거나 인간사회는 병폐가 만연하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교묘한 사기, 완곡한 중상, 얄팍한 괴변, 되지도 않은 이론 따위가 늘어가는 데 따라 사람들은 또 언어의 마술에 정신을 잃어갔다… 품위 높은 소박하고 입 무거운 사람들을 젖혀놓고 입만 까진 하찮은 무리들을 좋아하고, 담담한 무위·자연의 생활 방식을 내던지고 터무니없는 가르침에 넋을 잃고 있다. 이 터무니없는 가르침이 천하를 어지럽게 한 근본 원인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3백 년 전에 인류의 근원적인 병 됨으로 ‘언어의 마술’을 지적한 것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 주변의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인간의 의식 속에는 실체와 유리된 얼마나 많은 연기가 차 있을까고 자성하게 된다. 아마도 이보다 더한 공해는 없을 것이다.

길을 가다 으르렁 대는 사자를 만나 맨손으로 갈기갈기 찢고도 이 뉴스감을 부모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삼손, 남들의 모함으로 법정에 서서 재판관이 살려줄 뜻을 비치는 데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 예수, 제 딸을 죽여 제물로 바칠 정황에서도 신과 맺은 서약을 지키는 입다, 그리고 형제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또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는 운명에도 무위자연에 자신을 맡겨 그 마음속에 아무런 요동이 일어나지 않은 요셉 등이 우리들 눈앞을 스쳐간다. 이들에게 신의 영이 임하고 신이 함께하셨다고 성서가 서술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고 느껴진다. 『장자』는 한 마디로 이 세상이 이런 이들과는 반대로 흘러 천하가 어지럽게 됐다는 요지다.

이런 세상 복판에서, “도를 모르는 소인의 지혜는 기껏해야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서 인간관계를 조절하려는 데에 그친다. 그들은 정신을 비소한 일상생활의 문제로 소모하면서도 진리와 인류를 아울러 구하고, 현상계와 초월계를 근원적 입장에서 일체화하기라도 하는 듯한 망상을 하게 마련이다. 이런 자들이란 우주의 광대무변함에 기가 질리고, 그 몸은 속사에 얽매여서 만물의 근원인 도 같은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이다.” 신을 논하고 우주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이들이 거울로 삼아야 할 말들이 아닌가? “어마어마하게 목욕재계하고 그 효능을 선전하며, 공손히 꿇어앉아서 남에게 강요하고, 북을 치고 노래하면서 전파하려 들고 있다.” 이는 거룩을 빙자하여 타인을 지배하려는 계략일 뿐이다. 또한 “남의 즐거움에 봉사함을 즐거움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기실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제 진실성을 잃은 사람”이라고 설한다. 선의에서 출발한 존재의 병 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우리들이 경청할 예리한 심리분석이 아닐 수 없다.

 

이리하여 이 세상에는 언제나 ‘알곡’과 ‘쭉정이’의 대비가 출현하게 된다. 원헌이라는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해서 1장 사방의 담에 에워싸인 오막살이에 거처했다. 지붕은 푸른 풀로 이었고 쑥대로 엮은 문은 형식뿐이었다. 대문의 두주리는 뽕나무로 만들었고 벽에는 창 대신 밑이 깨진 독을 대었고, 방이라곤 두 개뿐인데, 누더기를 창 틈새에 틀어박아 놓고 있었다. 지붕에서는 비가 새었고 방바닥은 습기가 찼으며, 집이라고 하나 아주 형편이 없었다. 그래도 원헌은 이 속에 단정히 앉아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부르면서 유유히 도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면서도 활기 넘치던 엘리야나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일부러 가난해지려는 사람이야 소수이겠지만, 한 사회의 전반적인 경제수준이 낮을 때 예수가 말하는 ‘좁은 길’을 가는 이들은 대개가 이렇지 않을까?

“그런데 어느 날 자공이 찾아왔다. 그는 큰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감색 속옷에 흰 겉옷을 걸쳤는데, 고급 차라 좁은 골목에 들어올 수 없었다. 한편 원헌은 가죽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쓰고 해진 신을 끌고 명아주 지팡이를 끈 차림으로 대문에 나타나 영접했다. 원헌의 모습을 보자, 자공이 말했다. ‘아, 선생은 왜 그리 피로하신 기색이십니까?’ 그 말에 원헌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재물 없는 것은 가난이라 하고, 배운 것을 행하지 못하는 것을 피로했다 한다고 하더군요. 나는 가난은 할 것일망정 피로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길을 가다가 남의 밭의 곡식을 훑어 먹는 것으로 주린 배를 채울 정도이면서도 스승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처지와 통한다 하겠다. 훗날 베드로는 “내게 은이니, 금은 없다”고 잘라 말하며 대신 소유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선언한다. 사도들은 원헌처럼 피로하지 않았던 것이다.

“자공은 멈칫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원헌은 웃으면서 말했다. ‘세상 눈치를 보며 행동하고 도당을 만들어서 친구가 되는 것, 허영을 위해 배우고 자기 이익을 위해 제자를 가르치는 것, 인의를 팔아 나쁜 짓을 하고 거마로 외면을 꾸미는 것, 이런 것들은 내가 차마 못하는 일입니다.'” 원헌의 신조는 종교를 직업으로 갖고 있는 이들이 멈추어 곱씹어볼 말이 아닌가? 또한 성공했다는 자가 대형차를 몰고서라도 옛 동료를 찾아나서는 모습, 정곡을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얼굴을 붉히는 자세, 그리고 그런 반응에 대해 웃으며 말을 해주는 정경은 이미 우리 시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다시 재현될 시대가 오려나? 그저 꿈속에서 연인을 본 듯하다. 그리고 원헌이 그런 짓들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못한다’는 표현은 그의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머리가 숙여진다. 그는 “맑고 고요하면 천하에 바른 것이 된다”는 노자의 비전을 체현한 것이리라.

 

우리는 원헌이나 경상초로 도를 따라 사는 이들의 표본을 삼을 수 있다. 그러면 이런 재목들의 특질을 좀더 들여다본다면 어떤 것들일까? 우선 이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넉넉히 가졌을 것이고, 자신과 대면하여 자기만이 알고 있던 두려움과 맞서 그 허상을 찢고 끝내 환함에 섰다고 할 수 있다. 망명 중에 빈들에서 양을 치던 모세가 그랬고, 짐짓 빈들로 나간 예수가 그랬다. 이런 이들이 그 후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며, 그것은 하늘이 부여한 참된 본성을 되찾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노자가 말하기를 “사람이란 비굴과 자만의 두 극단에 시달려서 끝내 자기의 본성을 잃고 만다”고 하는데, 이런 정황에서 “타고난 바른 마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보이는 증거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실로 나타난다”(fearlessness). 두려움에 싸여 있는 인생들은 이런 존재에게 카리스마를 느껴 끌리기 마련이요,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를 따른 것일 뿐, 그가 어찌 사람들을 모으고자 생각이나 했겠느냐”는 정황이 펼쳐진다. 그리하여 예수도 “몸을 죽이되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고 가르쳤으니 그 자신 그랬을 것이요, 그런 예수를 처음 보는 베드로의 형제들이 그물을 놓고 그에게 끌린 것도 이 때문이리라. 그러니 아직도 사람의 눈치나 여론이 무섭고 이것저것 겁나는 사항이 남아 있다면 그는 아직 하늘이 부리는 목자나 농부라 할 수 없다.

그런 이는 “잘 적에는 꿈을 꾸지 않고 깨었을 때는 마음을 괴롭히는 근심이 없다. 그 정신은 순수하며, 그 영혼은 피로를 모른다.” “먹는 데에도 맛에 끌리지 않고 그 호흡은 깊고 고요하였다… 발뒤꿈치로부터 나오는 듯이 깊이 숨을 내쉬지만 범인들은 기껏 목에서 호흡하는 데 그친다.” 모르긴 해도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나 짐짓 숨을 내쉬었을 때도 이런 호흡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는 피로를 모르고 활력으로 특징지워진다(vitality). 이것이 모세가 120세에도 눈이 침침하지 않았다 하고, 비스가 산정에 아무의 도움 없이도 오를 수 있었던 연유이리라. 이것이 또한 신을 앙모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피곤치 않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이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구태여 북을 두드리면서 잃은 자식을 찾는 것처럼 떠들어댈 필요가 없다… 그러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순박함을 잃지 않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가 영으로 태어난 사람을 ‘바람이 임의로 불되 어디에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모른 것과 같다’고 비유한 것도 이런 계획이나 근심, 후회나 자책의 짐에서 벗어난 즉자적인 모습을 형용한 것일 게다(spontaneity).

그러면 이들의 내면은 무엇으로 차 있는 것일까? “저 텅 빈 공간을 보라.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는 저절로 밝은 햇빛이 넘치듯 차 있지 않은가. 행복도 또한 인위를 버린 공허한 마음에만 깃드는 것이다… 눈과 귀가 전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의 분별을 버려라. 이리하면 신(神)도 와서 깃들리니 하물며 사람들이 찾아와 의지할 것은 새삼 논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곧 이들은 ‘텅 빈 기쁨'(hollow joy)으로 차 있는 것이요, 기쁨을 모르는 인생들이 이들에게 끌리는 것은 거의 물리법칙과 같은 것이리라. “마음속을 언제나 즐겁게 하여 온갖 변화가 있어도 기쁨을 잃지 말며 밤낮 없이 사물과 접촉할 경우에도 일체의 사물을 봄과 같은 따스한 마음으로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온갖 사물과 접촉하면서도 마음속에 화창한 봄을 가져오게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완전한 재능을 가졌다고 이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기독교의 표어는 바로 어떤 경우에도 화평함과 기쁨을 보전할 줄 아는 ‘완전한 재능’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이는 “입에서 나오는 말도 새의 지저귀는 소리 모양 무심에서 흘러나오게 되며 이렇게 그 말이 새의 지저귀는 소리와 같아지면 그 덕도 천지와 하나가 된다.” 예수는 제자들이 당국에 체포되어 법정에 설 경우에 어떻게 답변할까를 걱정하지 말라고 명한다. 그는 때가 되면 입에서 절로 말이 나올 것이요, 이는 바로 천부의 영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밝혀준다. 무심한 존재의 상태에 버티고 서 있노라면 천지에 합한 말이 새의 지저귐처럼 흘러나오는 것이 우주의 법칙인가 보다(free flowing speech). 또한 “언어에 있어서도 꾸밈없이 자연 그대로 말하면 백성은 저절로 감화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손을 움직이고 턱으로 가리킬 뿐이건만 사방의 백성이 모두 사모해 모여드는 것이니 이것을 성인의 정치라고 이른다.” 아마도 예수가 학식 있는 자들을 버리고 꾸밀 줄 모르는 어부를 제자로 삼은 뜻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이들은 하는 일마다 빈틈없이 짜지 않는다. 이는 “천하를 바르게 한다고 하여 금지하는 일이 많으면 백성들은 더욱더욱 가난하여지고… 나라의 법령이 많이 발표될수록 도적은 많아지며… 그 정치가 빈틈없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분석하고 자세히 살피면, 그 백성들은 경쟁심이 생겨 모두 욕구불만의 상태에 빠질 것이다”는 노자의 통찰에 근거한다. “백성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일은 농부처럼 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은 없다. 농부는 밭을 다스릴 때에 힘써 잡초를 제거하고, 농작물을 제일(齊一)한 것이 되게 한다. 그리고 자연에 맡기어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는다”고 노자는 설한다. 이런 헐렁함은 하늘이 개입하실 여백을 마련하기 위함일 게다. 가롯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는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 사도들이 다수가결에 의하지 않고, 무작위 제비로 뽑았다는 것은 바로 조마조마한 하늘의 재량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었다는 것이요,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과 다름 아니다(let go).

 

이러한 재목들이 펼치는 목회의 진수는 인생들을 도(道)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 도에 관해 노자는 이렇게 말한다. “옛 사람들이 이 도를 귀중히 여긴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도를 가지고 구하면 구하는 것이 얻어지고, 죄가 있어도 도가 있으면 죄를 면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까닭에 도는 천하에 가장 존귀하다고 한 것이다.” 예수도 인생들에게 하늘에 ‘구하라’고 가르쳤고, 많은 이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자신의 천명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자신을 바로 그 길(道)이라 칭하고 제자들에게는 ‘너희가 죄를 사해주면 사하게 된다’는 특권을 맡긴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권한이요, 이 이상의 카리스마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목회의 목적은 뭇 영혼들을 하늘과 이어놓아, 맑고 고요하며 자족하는 피조물로 커가게 하는 것이다. 이것 말고 구원의 다른 내용이 있을 리 만무요, 꽃 따로 향기 따로가 아니듯 이런 바탕에서 절로 피어나는 향기가 곧 사랑이며, 이런 바탕에 옷 입히시는 하늘의 제 2의 신비가 영원한 생명이다.

“정신이 태연히 안정되면 하늘의 밝음(天光)이 발한다. 하늘의 밝음이 발하면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본다. 그리고 몸을 닦은 사람은 그 후 항구적인 도를 얻게 된다. 이 도를 얻은 사람에게 백성들이 사모하여 모여들며 하늘도 그를 돕게 마련이다. 백성을 모여들게 하는 사람을 ‘하늘의 백성’이라 하고 하늘에 의해 도움 받는 사람을 ‘하늘의 아들’이라 한다.” 예수는 욕심이나 증오로 인해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고, 풍랑과 같은 신체적 위험이나 생사람을 잡으려는 음모에도 태연한 정신을 보여 제자들에게 이전시켰고, ‘내 아버지, 또한 너희의 아버지’라 하시며 그들을 하늘에 이어놓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스승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할 수 있는 한 가지, 곧 목적이 없는 ‘기다림’ 속에서 ‘하늘의 밝음’을 받아 가히 하루에 3천명이 모여 들었으니 ‘하늘의 백성’과 ‘하늘의 자녀들’이 된 것이요, 하늘이 펼치시는 손길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낀 원형 세대가 된 것이다. 사도행전은 초기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을 쓰기 전에, ‘도를 따르는 자들’이라 했음을 증언하고 있으니, 예수와 사도들은 이런 도를 지구공동체에 뿌리내린 것이요, 하늘은 이런 이들을 통해 오늘도 쉬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끝으로 하늘의 재목은 노자가 말하는 대도(大道)를 닮아 “공을 성취하고도 이름을 드러내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신에게 맡겨진 공동체를 ‘내 것’이라 여길 리 없고, 자의로 자신의 혈육에게 상속시키는 죄를 지을 리 만무다. 이는 더욱이 “공을 이루고 나면 이룬 자가 물러나야 하는 것이 천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하늘은 모세 다음에 여호수아를, 엘리 다음에 사무엘을, 사울 다음에 다윗을 세웠듯이 언제다 또 다른 재목 쓰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